·8년 전
나는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성정체성이다.
나는 생식기나 외관으로만 보자면 여성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로 동질감이나 소속감이 느껴지는 성별이 없는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어렵고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들을 대하기 힘들어하고 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진 것이 성정체성에 더 큰 혼란을 준다.
나는 미취학아동 시절엔 남자아이들과 곧잘 놀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여자아이들과 더 친해질 계기가 많았다. 알게 모르게 성별을 자각하게 된 아이들은 여자아이들끼리 남자아이들끼리 어울리게 되고 낯을 심하게 가리고 내향적인 나에게 먼저 말 걸어주는 아이들은 대부분 여자아이였다. 이따금 몰려서 축구나 농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이 부럽기는했지만 운동에 그렇게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 가깝게 지내주었던 여자아이와 노는 게 좋았기 때문에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와중에 친하게 지내던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절교 당하기도 했었다. 좋아한다고 해도 그 여자아이와 사귀는 사이가 되고 싶다거나 독점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흔히들 말하는 '좋아하는 애 괴롭힌다'고 하는 행동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절교당했다. 그 친구가 당시 꿈이 연예인이라며 언젠가는 프로필 사진을 찍어왔는데 못생겼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심술궂게 말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전혀 밉거나 싫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 내 생각에 연예인 될만큼 예쁜 얼굴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예쁘다고 해야되나 설명하기 어렵지만 예뻤다. 옆에 다른 친한 여자애가 피부가 희고 말랑말랑해서 귀엽다고 다들 볼을 잡아당겨도 나는 그 절교당한 친구 볼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 친구가 머릿결을 자랑하면서 포니테일을 흔들면 만지고 싶었다. 그 친구 머리를 만질 때랑 내 머리를 만질 때는 느낌이 달랐다. 빼빼로데이 같은 기념일에 친한 친구끼리라고 과자에 딸린 선물을 주면서 이 중에 뭐가 제일 좋아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라고 하면 다 가져가버렸다. 진짜 그 물건이 갖고 싶었던 건 아닌데 순간 가져가놓고 속으로는 죄책감 혹은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 친구가 거절을 못하고 알았다고 하는 사이 말도 못하고 상황은 끝나버렸다. 아마 그런 일이 하나 하나 쌓이면서 그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절교하자고 했을 것 같다. 그 친구와 절교하고 정말 펑펑 울었다. 내 잘못으로 영영 헤어지게 된 첫 번째 인간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 후로는 여자애들에게 조심스러웠다. 나는 꽤 입이 걸고 눈치가 없고 세심함이 부족하고 표현에 인색했기 때문에 내 있는 그대로로 대하면 미움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함부로 장난도 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향해 욕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대하면 여자아이들도 보편적으로 나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곤혹스러운 것은 여자아이들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종종 손을 잡거나 팔장을 끼거나 기대거나 할 때였다. 기본적으로 나는 타인의 접촉이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고 불안하다. 어찌됐든 여자끼리니까 뭐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은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가끔 여자아이들 중에 신체접촉을 친밀감의 척도로 삼거나 스킨쉽을 기본적으로 좋아하거나 신체접촉을 거절하면 상처받는 아이들이 옆에 있을 때면 죽을 맛이었다. 꽤 가깝게 지내는 여자애와 손이라도 잡게 되거나 어깨에 기대오면 손에 땀이 차진 않을지 나도 모르게 움찔대진 않을지 온 신경이 접촉부위에 쏠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했다. 하필 느끼는 그대로 표정이나 태도에 다 드러나는 편이라서 숨기지도 못하고 불편한 기색이 드러나는 날에는 "불편해?" "미안, 괜히 친하지도 않은데.." 그런 질문이 올 때마다 죽을 맛이었다. 나에게는 평소 친구를 좋아하는 것과 신체접촉은 정말 많이 다른 문제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초등 고학년쯤 되자 아이들은 사귀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귄다거나 고백하거나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가질 않아서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는 남자애의 이야기 등을 할 때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다. 재미가 없었다.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하며 정말 친한 사이가 되는 듯한 도취감을 나도 느껴보고 싶어 억지로 그당시 속으로만 친해졌으면 하던 남자애를 좋아하는 애로 둔갑시켜 보았다. 관심사가 겹치고 개그코드가 맞아 더 친해지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만 속으로 좋아한다고 아무리 스스로 세뇌시켜봐도 다르다. 그 남자애와 친해지고 싶긴 하지만 그 아이와 단둘이 혹은 오래 있고 싶지는 않다. 손을 잡거나 스킨쉽을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싫다. 그 아이가 다른 누군가와 좋아하고 사귀어도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들진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데 억지로 생각한다고 좋아지지는 않는다. 나는 점점 남자아이들과도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관심사나 화제거리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깨지는 유리처럼 조심해야한다는 부담감이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짓궂은 장난을 치며 마음껏 욕해도 험악하게 싸울망정 없는 눈치 봐가면서 마음 졸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우연히 초등학교 6학년, 짝꿍이 된 남자아이와 말을 트게 되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공통된 관심사도 있고, 한창 신물이 나 있던 좋아하는 사람이나 연예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장난으로 괜한 시비를 걸고 서로 의견이 같지 않아 가벼운 언쟁을 해도 진심으로 화가 나는 일이 없었다. 나도 드디어 남자애와 친해지나 기대되었다. 우리는 꽤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그 남자애로부터 고백을 받았다. 요컨대 나와 사귀고 싶은, 현상태를 넘어 친구와는 다른 관계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우선 처음으로 받은 고백에 크게 당황했고 충격받았다. 한 번도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대상으로 비춰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다른 누군가를 그런 대상으로 본 적도 없었다.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알 수 없는 배신감도 들었다.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원치 않는 결과를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설상가상 그 일이 반 전체에 소문이 나서 원치 않는 관심과 호기심에 노출되고 소문의 주인공들을 엮어주려는 시도도 겪게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공격받는 기분이었다. 한순간에 정말 괜찮다고 생각한 그 친구는 원수가 되었다. 밑도 끝도 없는 적개심이 들었다. 결국 졸업 전까지 나는 노골적인 거부와 폭언을 퍼부었다. 지금에서야 그 친구의 잘못은 아니고 내가 분명 상처를 주고 못된 짓을 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후에 나도 누군가를 그런식으로 좋아해보고 난 뒤에야 문득 깨달았을 뿐이다.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아이들은 심하면 심해졌지 연애대상이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끊지 않았다. 소수의 여자아이들과 다행이 잘 지내면서 남자아이와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잘 지내고 이 남자애와 더 친해지고싶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정도 가까워지면 너무 가까운 것 아닌가 나를 또다시 연애대상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나고, 옆에서 누가 장난이라도 '너희 뭐야, 왜 이렇게 친해?' '관심있는 거 아니냐' 뉘앙스라도 풍기면 그날로 바로 관계를 단절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남녀공학이지만 남녀분반이라는 기형적인 환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환경은 그또래 아이들의 관심사와 맞물려 잠재적 연애대상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몰고 왔다. 여자반에서는 또다시 연애얘기,연예인얘기,화장품,향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흥미없고 진심으로 공감가지 않는 화제에 겉돌 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마음이 맞는 아이들도 있었기에 늘 그런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점점 어린시절 같이 뛰놀던 남자아이들이 그리웠다. 그러던 중 교내나 학교주변에서 친하게 지내자며 접근하는 남자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낯선사람이라 경계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당시 나도 친하게 지내는 남자인 친구를 너무 갖고 싶었다. 가뜩이나 낯가리고 처음보는 사람한테 말도 못 붙이는데 내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에게 은연중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친하게 지내자로 시작해서 그 남자애들이 결국 나에게 바라는 건 친구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는지 도중에 그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백이면 백 나에게 먼저 접근한 그 남자애들은 모두 나를 연애대상으로 생각했다. 그 중에는 정말 괜찮은 것 같고 정말 친하게 지내고 싶은 궁금한 아이도 있었지만 그 남자애는 나를 연애대상으로 좋아하는 것이지 친구는 결코 될 수 없다. 처음부터 연애대상으로서의 호감을 표출하면 거절하고, 내가 연애대상으로 보여지는 것 같다 느껴져도 거절하고. 속상했다. 이것이 반복되다보니 내가 여자라서, 내가 남자였으면 이렇지 않았을까, 내가 남자였더라면 너랑 단짝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남자였으면 네가 잘하는 축구 같이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는 없는 자존감에 처음부터 내가 여자라서 말 건 건가,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말 걸 일 따위도 없었을까, 여자가 그들의 연애대상이고 내가 여자이기때문에 관심을 가진 것이지 하긴 나같은 것에 관심을 가질리가. 한번도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여자인 것이 문제인 것처럼 여겨졌다. 반면 여자애가 나에게 연애대상으로서 호감을 드러낸 경우는 없었기에 다른 생각으로는 뻗어나가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여자애건 남자애건 연애대상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던 중 내 생애 유일무이한 예외가 나타났다.
고2, 내가 연애대상으로 느끼는 상대가 생겼다. 확실하게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고등학생 때 헤어지고나서 지금까지도 그 한 사람을 제외하고 연애대상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내 첫사랑은 남자였다. 정말 예외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도대체 왜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연애대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분명 그 애도 처음에는 다른 남자애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당시 내게 접근하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남자애들에게 신물이 난 나는 남자애들을 더 경계하면 경계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같은 반에 당시 꽤 좋아하던 친구가 지인라며 꼭 사귀라는 게 아니라 친하게 지내보라며 바람잡고 나도 아닌척해도 남자인 친구가 갖고싶다는 미련을 놓지 못해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연락하면서도 계속 언제 연락을 끊어야하나, 보통 상대방이 고백하면 거절하고 다시는 안 보는 패턴이어서 그 전까지 '또 같은 일을 겪겠지 언제 거절하나', '아니야 혹시 이번에야말로 진짜 친구하자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사이에서 줄다리기했다. 결국 사귀자고 연락왔을 때, 아 올 것이 왔구나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거절해야겠지 분명 처음엔 그리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 수록 거절하면 이제 얘도 다시는 못 볼 텐데 생각하니 그 아이를 다시는 못 보고 관계가 영영 끊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종국에는 사귀는 것보다도 아예 영영 헤어지는 것이 더 무서워서 결국은 수락했다. 수락해놓고 나도 당황했다. 무언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느낌이 들면서 좋아하지도 않는데 지금 사귀자고 한건가 하는 죄악감이 들었다. 나는 사람과의 접촉도 무척 불편하고 연애는 관심도 없고 이미 스스로가 가진 정신적인 문제가 많아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귄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영문은 몰라도 나는 확실히 그 애를 연애대상으로 좋아했다. 걔 옆에서 극도로 긴장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래도 옆에는 있고 싶었다. 없는 자존감과 흔들리는 정체성 때문에 남들이 예쁘다하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는데 걔가 예쁘다고 하면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힘들 때 그 애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아무 내용 없어도 들으면 위안이 되었다.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접촉도 막상 닥치고 나니 참을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정말 좋아해도 신체접촉이나 스킨쉽을 할 때 내가 먼저 닿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 자신도 내가 거절할 줄 도망칠 줄 알았는데 참을 수 있었다. 친밀한 스킨쉽을 해도 전혀 혐오스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비례해서 그 옆에 있는 게 세상 누구의 옆보다 긴장되고 편할 수가 없었지만 불편해도 도망치고 싶지 않고 같이 있고 싶었다. 하도 내가 걔 앞에서 유독 극도로 긴장하니까 편하게 친구처럼 지내자며 나한테 욕해봐 때려봐 장난스럽고 편하게 대할 것을 요구했지만 절대 그렇게 대할 수가 없었다. 남자애인데도 차마 때리기는 커녕 욕 한마디도 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상처받기 쉬운 타입의 여자애를 대하듯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어떻게 걔한테 그런짓을 난 못해 그런 심정이었다. 그 애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는, 친구로 생각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이었다. 대체 걔가 무엇때문에 다른건지(좋은건지) 처음부터 알던 사이도 아닌데 외모때문이라기엔 맨 처음 봤을 때의 얼굴은 상황때문에 잘 생각도 안 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아이가 정말 너무 예뻤다. 원래 미적취향상 남성의 얼굴이 아닌 여성의 얼굴이 예쁘다고 생각해서 좋아했는데, 남성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이 내가 본 어떤 여자의 얼굴보다 예뻤다. 그 아이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지까지는 워낙 나자신이 성에 대해 비틀리고 부정적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키스까지도 어떻게든 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내가 그 아이를 꽉 안고싶다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었다. 그 이상이 가능한지까지는 그아이와 헤어진후 성적매력을 느낄 가능성이 있는 연애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꽤 자주 첫사랑을 생각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좋은지,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게 연애대상으로 볼 수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별별 생각을 다 해 보니 심지어 나는 그 애가 남자라서 좋았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때까지 연애대상은 아니어도 내가 예쁘다 생각하고 더 조심스럽게 신경쓰고 잘해주고 외모적으로 눈길이 갔던 건 오히려 여자애들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내 첫사랑이 여자였어도 난 좋아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만약 고백해왔다면 몰래 사귈지언정 고백도 결국 받아줬을 것이다. 내 첫사랑이 여자였어도 나이차이가 많이 났어도 외국인이었어도, 심지어 기혼자였어도 문제는 심각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경우에 스킨쉽도 마찬가지로 실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만큼 어떤 모습에도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인 그 사람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 난 다행이 대학을 갔고 나 자신의 문제는 심각할지언정 운좋게 새 주변인들이 괜찮았다. 특히 신입생때부터 들어간 동아리가 무척 잘 맞아서 활동하는 몇년간은 일시적으로 내 상태가 꽤 호전되기까지 했었다. 동아리는 처음에 남초과에서 설립된 것이 시작이었기때문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해도 남성의 성비가 확실히 높았다. 나는 아주 어렸을 적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남성들과도 어울려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낯가림과 안 좋은 정신상태에 치어 무척 힘들었지만 그 집단이 너무 마음에 들고 잘 지내고 싶어서 첫사랑이후 살아생전 최대치로 노력했다. 말을 더듬고 대답을 잘 못해도 누가 말만 걸어오면 무조건 뭐라도 대답하려고 안간힘을 썼고, 동아리 특성상 사람들이 술자리를 좋아해서 거의 모든 술자리에 참가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흥미를 끌었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다. 동아리 사람들도 내가 좀 특이하다거나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고 느낄망정 나를 진정으로 비웃거나 상종하지 않거나 깔아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낯가림이 조금씩 나아졌다. 고학번 남자선배들과 밤새 술마시면서 서로 허세부리고 말장난하며 떠드는게 즐거웠다. 남자동기들이랑 술먹고 서로 욕하고 ***이고 장난질하다 지저분한 동아리방에서 한데 뭉쳐 자고 다음날 아침에 해장하는 일이 즐거웠다. 남자후배들한테 구박하는 척하면서 시비걸고 걸리고 먹을 것 사주면서 허세부리고 아부하는 척 장난으로 비웃음 당하는 게 즐거웠다. 아무래도 술이 빠지지를 않다보니 상대적으로 여자선후배 동기들과 심리적으로 덜 가까운 경우가 더 많았지만 여자끼리보단 남자선후배 동기들이 있을 때 더 편하고 재밌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끼리끼리 모여있을 때면 전부 남자들 사이에 나만 홀로 홍일점일 때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술자리에선 술을 강요하는 일은 없었지만 술을 많이 좋아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고보면 남성이 더 나의 성별에 가까운가 싶지만 나는 결코 남성은 될 수 없었다. 나는 남성들이 겪거나 생각하는 성적인 면 그것만은 이해할 수도 겪어본 적도 없었다. 남자후배가 '형, 군대 대체 언제 가요?' 라는 농담을 하고 남자동기가 '야 오늘은 *** 달린 놈들끼리...아, 없네..'하고 멈칫하는 지경이 되어도 나는 남자단톡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의 성에 대한 비틀리고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평소에 남녀가 섞여있어도 장난으로 넘길 수 있는 수위의 성적인 농담은 나도 어울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듣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은 어렴풋이 그것을 느꼈는지 그래도 여자라는 일말의 인식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다행이 일정 수위를 넘기지 않고 조심해주었다.하지만 간혹 남자후배들이 아무 생각 없이 수위를 넘나드는 성적인 이야기(경험관련)를 꺼내거나 하도 편하니까 동아리방에서 19금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는 너무 도망치고 싶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 이야기를 하다 은연중에 남자선배가 ***을 본다는 사실을 본인 입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을 때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지도 않고, 그 선배가 갑자기 달리 느껴지거나 꺼려지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전혀 아무렇지 않았지만, 다른 이야기중 남자후배가 무심코 본인성경험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하려 했을 때는 정말 귀를 막고만 싶었다. 나에게 있어 성적 대상에 대한 욕구, 성적 행위는 소설 속 존재와 같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현실로 끌려나오고 심지어 내 가까운 이가 대입되어 상상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너무 끔찍했다. 성에 대해 통하고 터놓을 수 없고 서로 조심하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와 남성은 완전히 같을 수가 없다. 설상가상 다른 남성의 눈에 내가 성적인 대상으로 비친다고 느껴질 땐 이해도 되지 않고 무척 불쾌하기만 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내가 정말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고 느껴지는 상황에 닥칠 때. 이미 나도 누군가를 연애대상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알게 된 마당에, 절대 연애대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나를 연애대상으로 좋아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그런데 한 술 더 떠 거기다 나에게 성적인 욕구를 비춘다니, 그 사람을 마냥 미워할 수도 원*** 수도 절대 응해줄 수도 없고, 타인을 향한 성적인 욕구란 것은 도저히 알 수도 없으니 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없고. 확실한 것은 그들과 나는 결코 이전처럼 돌*** 수 없었고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남성에 대해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여성은 남성과 달리 예쁘지만 화제에 공감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고 여전히 대하기 조심스럽다. 여성 또한 나와 같은 성별로는 느껴지지 않고 나에게는 다소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여성에 대한 환상마저 있다. 요컨대 여성은 나보다 섬세하니 결코 욕을 하거나 거칠게 대하면 안 되고, 귀엽게 생각하는 여후배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는 처음엔 알게 모르게 충격을 받았다. 또 늦은 밤이나 새벽에 막차가 끊기기 전에 여자애들이 귀가해야하지 않을까 신경쓰이고, 여자애들은 왠지 지저분한 동아리방에서 막 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공중목욕탕도 이용하지 못하는데 내 ***을 보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다른 여성의 ***을 볼 수도 없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나에게는 남탕에 들어가는 것과 여탕에 들어가는 것이 똑같은 끔찍함으로 다가온다. 노출이 심하거나 굴곡이 드러난 차림의 여성을 보게되면 보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자꾸 신경쓰인다. 심지어 동아리 수련회에서 여후배가 여자방이라고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티셔츠를 환복하는 바람에 가슴부근을 얼핏 보았을 때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혹감,죄책감,죄악감,알 수 없는 수치심? 마치 내가 성범죄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가장 끔찍했을 때는 내가 입이 무겁고 가까운 사이라 느껴진다는 이유로 나를 앞에 두고 여자선후배가 자신들의 성경험 관련 이야기를 하려할 때였다. 남자후배들이 그랬을 때와 똑같이 끔찍했다. 옆에서 ***에 관심있는 여자애가 열변을 토해도 어딘가 한 발짝 떨어져서 남의 얘기처럼 들린다. 오히려 옆에 있던 남자애는 조심스럽게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함께 대화를 이어가지만 나는 피상적인 얘기 외엔 누구의 입장도 되지 못하고 꿀먹은 ***가 된다.
결국 나는 내 성정체성에 대해 잘 모르겠지만 내게 그 문제는 내가 연애대상이나 성적대상으로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고로 그 사람과 내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지금, 사실 내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지금 앱으로 가입하면
첫 구매 20% 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