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네요. 양해부탁드려요.
지금은 타지에서 자취를 하면서 살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평소에는 문제 없이 지내다가도 가끔씩, 혹은 자주 어렸을적 억울한 과거가 떠올라서 그때마다 하던 일도 진행이 안되고 제 마음을 괴롭히네요.
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란 건 맞지만 많이 엄격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는 공부가 중요하다는 말을 해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때 공부안한게 한이라며(지금은 전업주부이십니다) 내 딸은 그런 한을 안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으니 아끼지 않고 지원해주겠다고 제가 중학생일 때 그러셨습니다. 아마 이런 한 때문에 제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던것 같네요. 지금은 세월이 흘러서 많이 유해지셨지만 어렸을 때 겪은 일은 쉽게 지워지지 않네요. 여기서 억울하다고 생각하는건 아마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모습이었던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매주 받아쓰기를 하는데 난이도와 상관없이 90점을 맞았을 때보다 80점을 받았을때 훨씬 많이 혼났습니다. 80점 맞았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80점 맞았던게 어머니께선 충격적이셨는지 많이 혼내셨고 제가 혼났던 내용의 대부분은 틀린 걸 정정하는게 아니라 이걸 도대체 왜 틀리냐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때 뭘 틀렸는지가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심지어 그 당시에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던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 이 얘기를 했더니 전혀 기억 못하시더군요.
8살 때 피아노 콩쿨에 나간 적 있었는데 제가 원래 긴장을 많이 하는 타입이라 제 실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2점 차이로 예선 탈락을 했습니다. 그 때도 개나소나 다 본선 올라갔는데 너는 왜 떨어졌냐는 식의 말을 들었습니다. 본선은 올라가지 못했지만 나중에 상패는 주더군요. 그때 혼났었으니까 칭찬은 못받겠지 싶어서 그냥 통보하는 식으로 '상패 주더라'고 하니까 '본선 떨어졌는데 이런걸 왜 줘' 라고 상을 막 뿌려서 싫다는 듯이 말씀하셔서 무안했습니다. 그 상패에 '특상'이라고 적힌게 수치스럽게 느껴져서 책상 밑 책꽂이 구석에 숨겨두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시험을 쳐서 올백을 받을 뻔 했지만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과목 전체에서 3개나 틀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어머니께 얘가 문제를 꼼꼼히 *** 않아서 쉬운 문제를 어이없게 틀린 것 같다고 하셨고, 그날 집에서, 그리고 할머니댁 가기까지 몇 시간동안 그 3문제를 틀린 것에 대해서 혼내셨습니다. "문제를 두번 세번 봐야지 쉽다고 오만하게 넘기니까 올백을 맞을 수도 있는데 기회를 놓쳤다" 는 내용이 주였습니다. 이 상황이 제일 아쉽고 후회되는건 난데 어머니가 더 아쉬워하는것 같았습니다.
9살 때 학습지에서 하는 지능검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큐 뿐만 아니라 언어, 수리, 창의성 등을 평가하여 각각의 척도를 그래프로 표시해서 결과표로 나왔습니다. 그 때 언어 창의성, 도형 창의성이 낮게 나왔는데 "무슨 문제가 나왔길래 이것밖에 안나왔어" 라고 따지셨고 제가 "초성 적어놓고 연상되는 단어 최대한 많이 쓰는 문제가 나왔다" 고 하니까 어머니께서 생각나는 단어를 말하시면서 이렇게 많은데 왜 2개밖에 못썼냐고 언성을 높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창의성이 낮다고 심각하다고 제 탓을 하셨습니다. 창의성이 낮으면 뭘 해야하는지(애초에 그게 제 잘못은 아니니까..) 9살이었던 저는 도무지 떠올리지 못했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성격검사도 동시에 했었고 도덕성이 만점에 가깝게 나왔는데 그 결과지에서 도덕성이 너무 높아도 안좋다고 쓰여있었나봐요. 그래서 도덕성이 너무 높아도 문제라는데, 좀 낮출 필요가 있다는 말을 저한테 곧이곧대로 하셨습니다.
이외에도 평소에 매일 발표를 했지만 참관수업 때만 손을 안들어서 '답을 미리 준비해갔는데 왜 손을 안들었냐'고 혼난 적, 영어 발표때 목소리가 작고 더듬거린다고 혼난 것, 학교앞에서 방문학습 홍보를 했고 아무 생각없이 집 주소를 적었더니 방문학습 교사가 집에 찾아와서는 일부러 어려운 문제 내놓고 60점 받아서 댁 딸 공부 못하는 거니까 방문학습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상술에 넘어가서 그 분 가신 뒤에도 혼내셨던 것(이후에 사과하셨지만 아직 잊혀지지않네요) 등등,, 사실 매 시험마다 그랬으니 셀수 없이 많아요. 학업에 관해 칭찬을 들었을 때는 1등했을 때, 그리고 모든 문제를 맞았을때(올백을 맞았을 때도 우리 반에 동점자가 몇명인지 물으셨습니다) 밖에 없었습니다. 2등이면 다음번에 더 잘하라고 했고 3등이면 혼났습니다.
중학교 입학한지 얼마 안돼서 촌동네에서 지역 내 공부 제일 잘하는 학군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여기서나 공부 잘하지 거기 가선 중위권 밖에 못할 거라는 말을 친구에게, 그리고 몇 어른들에게 들었지만 가서 처음 친 중간고사에서 반 3등을 했습니다. 중위권밖에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 겁이 났었는데 이 정도 성적이면 나름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3등밖에 못하냐고 혼났습니다. 웃긴건 그때 3등했던 중간고사, 수행평가, 기말고사를 합산한 성적이 알고보니 반 1등이었고, 어머니께서는 지인들에게 그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고다녔습니다.
이후 고등학교를 자율고로 진학하고, 뛰어난 애들이 많이 모였고 성적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시험 칠때마다 전교 50등까지 벽보에 이름이 붙는데 이름이 붙지 못해서, 뭐때문에 성적이 안좋냐고 많이 다그치셨습니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로 심리적인 문제가 생겨서 시험을 쳐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몸에도 신경성으로 이상이 생겨서 스스로 학교 심리상담센터를 찾아간 뒤에야 어머니께서는 이제 성적 신경쓰지 말라고 성적 가지고 뭐라 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대놓고 면박을 주는 일은 없었지만 표정으로 불만족한다는게 눈에 보이는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결국 명문대에 왔고,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 압박감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분명 내 꿈을 이루려고 공부를 하는건데 이상하게 그 위에 어머니라는 부담감이 얹어진 것 같았고, 거기에다 어린 시절 추억이 없어서 놀아야한다는, (잘해야한다는 생각과 어린시절 추억이 없도록 만들었던 어머니를 실망***고 싶다는 무의식이 묘하게 공존했습니다.)보상심리까지 더해져 집중이 전혀 안됐습니다. 성적이 못나왔을 때 다음번엔 제발 잘하자라는 얘기를 매번 들었고 이게 또 부담감으로 작용하여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2학년 때 대학원 진학이라는 꿈을 내려놓고, 해가 뜰때까지 펑펑 울고 난 이후로는 성적에 대해서 초연해졌고, 차라리 그 뒤로는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성적에 대한 질책은 없지만, 내가 살던 지방의 대학에 다니는 누구누구는 성적으로 장학금 받더라 라는 말을 은연중에 하셔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비교를 위해 하신 말씀은 아닌거같지만 '내가 아는 누구누구는 공부를 많이 해서 엄지손가락에 지문이 없어젔다더라' 라고 하셨는데 자기 딸이 어렸을때부터 연필을 많이 쥐어서 엄지 지문이 옅어지고, 살이 무르게 변해서 왼손 엄지와 감각이 달라진 건 제가 말하기 전까진 안 궁금하셨나 봅니다.
맨 위에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부모님의 영향으로부터 많이 벗어났습니다. 회피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는것 같고(정확히 진단 받은건 아니고 이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못해 친구가 몇 명 없다는 성격적인 문제도 있지만 부모는 완벽하지 않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 부족한 부분을 내 스스로 성장하면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 어떤 계기로 인해서 과거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건 어쩔 수 없나봐요. 그리고 과거 생각할때마다 어렸을 때 공부만 했어서,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게 전부라 추억이 없고, 아이로써 살았던 기억이 거의 없네요.
저한텐 고등학생 동생이 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그 나이때의 저랑 비교를 하면서 동생의 나태함을 지적했고(그래도 동생은 성적이 평범한 편이기 때문에 막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진 않습니다), 그에 대한 반항심으로 동생은 더 공부를 안하고 그래서 어머니랑 자주 싸우나봐요. 부담 주면 반감이 들어서 더 하기 싫어진다고 어차피 잔소리 해도 안하는건 똑같으니 자발적으로 계기가 생길때까지 기다리라고 제가 그랬는데 오히려 제가 본가 내려갈때마다 쓴소리 한마디씩 하고 가라고 합니다. 어쩔땐 내 존재(그냥 내 존재가 아닌 어머니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내 존재)가 동생한테 스트레스를 주니까 어머니 앞에서 화내고 싶은데 오랜만에 본가 내려가서 얼굴 보면 반가워서, 그리고 겉으로는 사이가 좋기 때문에 화내는게 쉽게 안되네요.
밤이라 그런지 횡설수설하네요. 주저리주저리 쓴건 어딘가 털어놓고 싶어서 그랬던 거고, 요약하자면 "가끔 저런 과거가 나를 집어삼켜서 아무것도 못할 때가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입니다. 전문가분의 의견, 혹은 비슷한 일을 겪으신 분은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