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금당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5학년까지 약 1년간이었죠.
시작은 유치원 말 부터였어요. 엄마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죠. 뭐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상해져가는 엄마로 인해 아***가 폭력적이 된 것인지, 혹은 아***가 그 영향을 끼친 것인지.
엄마는 당시 조현병 및 피해망상 초기증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이 굳기 시작하더니, 구부러들어 마치 닭발과도 같은 꼴이 되었지요. 그러면서 저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밖으로 잘 나가지 못하게 했고, 식사시간마다 음식을 과하게 먹게 만들게 했죠.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매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라는 단어를 말했다고 때린다던가, 밥을 냉면그릇 한 가득 퍼놓고서는 다 먹지 않았다고 때리기 시작했죠.
증상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한여름에 우산을 테이프로 손에 묶은 채 학교에 찾아와 운동장 한복판에 쪼그려 앉아 절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혹은 수업시간에 교실까지 들어와 절 데려가기도 했죠.
그 과정에선 몇 명의 선생님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소리를 지르고 울거나,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질문이든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대답하는 등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증상은 한층 더 심해졌죠. 저는 1년간 집에 갇혀있었습니다. 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학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들로 말과 행동을 통제당했죠.
한여름에 겨울용 솜이불을 두 겹씩 덮은 채 14시간 넘게 자거나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숨소리를 내거나 뒤척이면, 곧장 매질이 뒤따랐죠. 음식을 목구멍까지 집어넣고서도(비유가 아니라 말그대로), 더 이상 못 먹는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습니다.
엄마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습니다. 문맥과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했죠. 특히 피해망상이 심했습니다. 어딜 가든 남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해코지를 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본인도 설명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데? 라고 물어보면 그냥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죠. 전화, 친구, TV등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사용해서는 안됐습니다. 바로 매타작이 날아왔죠.
무슨 이유가 있던지 간에 매일 맞아야 했습니다. 집에 갇혀있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몰래 담을 넘어 도망치거나 놀러갔다면, 다음날 죽도록 맞았습니다. 허벅지 전부가 멍이 들어 앉지도 못 할 정도로요.
그 당시 명절 때 오늘은 한 대도 안 맞았다며 기뻐하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그날 저녁에도 맞았지만요.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저는 아***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은 저에게 견딜 수 없는 공포였거든요. 아***의 감정은 너무나 격했습니다. 말이 기독교 신자였지 싸움이 나면 ***이 따로 없었죠.
이해는 합니다. 그 분노는 지금도 제 안에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미움과, 참았던 짜증, 자식에게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분노가 어찌 그리 나긋나긋하겠습니까.
하지만 어렸던 저에겐 세상이 끝나는 것과도 같은 공포였지요. 집안 집기들이 부서지고 주먹질과 몽둥이질,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 나를 붙잡는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에게서 나를 떼어내려 다리든 어디든 잡고 끌어당기는 아***.
아마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을 겁니다. 웃음이 나오네요. 하지만 아***는 날 구해주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몰랐겠지요. 일 년간 제가 급격히 살이 찌고,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어도, 한여름에도 입어야 했던 겨울 옷에 가려져 알 수 없었겠지요.
그런 저에게 유일한 오락거리는 매일 아***가 빌려다 줬던 세권의 책들 뿐이었습니다. 아***는 최대한 엄마의 정신병원 입원을 보류하고 싶었던 듯 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자신의 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희생하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그 사이에 망가져가는 저를 방치했습니다. 뭐...몰랐으니까요. 저녁식사를 끝내고 과일을 깎아 먹을 때, 웃으면서 장난으로 다리 전부에 멍이들어 앉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나, 그 즉시 집안이 난장판으로 변하는 집안이 비정상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몰랐던 겁니다.
마침내 아***는 입원용 차량을 호출했습니다. 그날 아***는 저를 놀다오라고 했죠. 대문으로 들어오는 의사의 뒷짐 진 손에 두터운 밧줄 묶음이 쥐어져 있던 게 아직도 선명하네요.
100미터쯤 떨어진 아파트의 7층에서는 엄마가 소리 지르는 것이 아주 잘 들렸습니다. 우리 집 주변에서도 아마 더 잘 들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집은 조용해졌습니다. 저 역시 얻어맞는 일은 없어졌죠. 선생님도 이런 집의 사정을 아시고 출석을 인정해주셔서 유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그런 생활을 한 아이가 얼마나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겠습니까.
선생들 사이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도 전 이상하고 가까이 하기 싫은 아이였죠. 못생겼고, 제대로 씻지 못해 냄새나고, 한여름에도 긴팔에 긴 바지, 모자를 쓰고 다녔으니까요. 감금당한 1년은 저에게 몇가지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격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얻어맞으면서도 살겠다는 오기는 악착같았으니까요. 다만 서툴러진 대인관계와,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를 내는 목, 살쪄버린 몸이 남았습니다.
아***는 지독한 기독교 신자였죠. 저와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대화가 아니었죠. 일방적인 설교일 뿐, 제가 원하는 소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뭐,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당신은 그러기 전에 제가 받은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저 과거에 본인이 거칠게 살아왔던 것을 생각하며, 다 그렇게 살았다, 더 심했다는 말이나 했죠.
항상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그러면서 제가 어떤 친구관계나 누구에게 의지 하지 말고, 그런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했을까요? 성경책이나 읽을까요? 어린아이들이 대화 주제로 가지는 대부분의 것은 아***가 세상의 것이라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자식의 사회성에 지대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거죠. 이해는 합니다. 늦은 나이에 구원을 받았다고 믿으며, 과거의 방탕한 자신과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 저를 지옥으로 밀어넣었죠. 당신이 말하는 구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손을 가지고 자식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하나님의 손으로 꺼내게 하는 건지 궁금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저는 몸이 자라서 더 이상 맞지 않았고, 엄마는 몇 번 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정신병원의 냄새와 풍경도 나름 추억으로 선명하게 남아있네요.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성적은 나름 괜찮았고, 저는 국립 지방대로 잔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우리 모두에게 미움과 연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병이 걸린 사람을 탓할 수도, 그런 아내를 맞이한 사람을 탓할 수도, 그리고 그들로부터 괴로움을 받은 저를 탓할 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저의 고통을 외면한 아***에게, 나의 아픔을 이해해달라고는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제로 몇 번 대화도 시도해 보았죠. 아***는 외면했습니다. 표정과 목소리가 일그러지고,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분노만이 돌아왔죠. 몇 번의 반복 이후로, 저는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받은 고통에 대해,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려는 사과만 반복할 뿐, 정작 내가 어떤 시간 안에 있었는 진 관심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아***를 탓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그릇이 그뿐이었음을 이해해야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름대로 헌신적인 아***였습니다. 얼마 전에 바꾸었던 휴대폰에는 아***의 문자가 빼곡하게 저장되어 있습니다. 4년간 1000통 정도 되려나. 참 꾸준하죠. 정작 저는 손에 꼽을 정도의 답장을 보냈군요.
그런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저는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화통화는 한 달에 한 번 할까 말까이고, 제가 먼저 거는 일도 거의 없죠. 집에 내려가는 일은 연례행사며, 특별한 이유 없이는 가지도 않습니다.
사실상 부모와 저의 (일방적인)관계를 유지해 주던 것은 대학시절까지, 미약한 금전적인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그 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어떤 내면적인 소통도 없었지요.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아***가 제 고통을 듣기를 거부한 순간부터, 그건 애초에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압니다. 누구도 저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음을 알죠. 나는 그들을 이해했지만, 그들에게 상처받은 나를 이해해 준 사람은 누구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저의 삶을 보다 낫게,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지금은 누가 봐도 자존감 높고 활발하며,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죠. 저 또한 저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 합니다. 아직도 방어적인 성격이 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하지만 이런 저에게도 가족에 대한 의구심은 늘 남아있습니다. 용서는 애저녁에 글러먹었고, 제가 그럴만한 위인이 아니란 것도 잘 압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다만 제가 해결하고 싶은 것은, 제가 한번씩 사로잡히는 이 격렬한 분노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냐는 겁니다. 그 시절에 당해온 부당함과, 그로 인해 비롯된 저의 부정적인 것들, 되돌릴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나 자신과 그 감정들을 생각하면, 견딜 만 합니다. 견딜만 만 하죠.
저와 좀 친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웬만하면 알고 있습니다. 깊이는 좀 다르지만. 그렇게 반복한 덕분에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졌지만, 아직 그렇게 한 번씩 치밀어 오르는 화는 쉽게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네요.
그런 감정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저의 진로, 결혼, 장래 등 현실적인 문제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으니, 해결하기가 쉽지 않네요. 빚이 없다 뿐이지 기초생활 수급자..아***는 사기로 전재산을 날렸고, 미래를 바라볼수록 저는 너무나 암담합니다.
과거는 지나갔지만 저는 고작 27살이고, 20년을 사로잡았던 기억들 중에 행복은 별로 찾을 수 없으며, 제 인생을 살기 시작한 7년으로 이겨내기에는 미래와 현실, 과거 모두가 너무나, 어렵네요.
타인들의 출발선에 이제야 도달한 것 같은데, 더 먼 길은 어떻게 가야하는지. 그조차도 살아있는 지금의 특권이라 믿으며 이겨내고 싶지만, 그저 눈을 돌리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은 것 같아 답답합니다.
최대한 지금만 바라보고 나아가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